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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라면… “에~오! 무대에 오르는 건 올림픽 같은 것”

등록 : 2018.12.11 04:40

수정 2018.12.11 11:52

 프레디 머큐리의 시점으로 재구성한 퀸과 머큐리의 삶 
영국 록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는 애초 구상했던 세 곡을 합쳐 ‘보헤미안 랩소디’를 만들었다. 히트곡 ‘섬바디 투 러브’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가스펠에 빠져 만들었다고 한다. 유니버설뮤직코리아 제공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지난 9일 700만 관객을 돌파했다. 10월 개봉한 영화 중 역대 최고 흥행 성적이다. 상영 첫 주말 관객보다 지난 주말 관객이 더 많았다. 흥행 기세가 강해 800만, 900만 관객도 가능하다. 일각에서는 1,000만 영화 등극도 조심스레 점친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사회 곳곳이 영국 록밴드 퀸 열풍이다. 퀸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1946~1991)를 패러디한 영상도 넘쳐난다. 퀸과 머큐리에 대한 궁금증도 커졌다. 퀸의 실제 활동과 머큐리의 삶은 어땠을까. 머큐리의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영국 공영방송 BBC의 다큐멘터리 ‘퀸 데이스 오브 아워 라이브스’와 책 ‘프레디 머큐리, 퀸 예술적 상상력의 르네상스’ ‘퀸의 리드 싱어 프레디 머큐리’를 바탕으로 했다.

영국 록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는 독특한 무대 복장으로도 눈길을 끌었다. 화려한 술이 달린 웃옷을 입거나 발레복처럼 몸에 딱 달라 붙는 바지를 입고 노래했다.머큐리는 발레에 대한 관심이 많아 1979년 영국 로열발레단과 합동 공연을 하기도 했다. 퀸 공식 홈페이지
 ◇주치의 조언 뿌리치고 섰던 무대 

에~오! 프레디 머큐리임. 한국 관객들이 영화를 보며 우리 노래를 ‘떼창’한다지.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군. 1984년 로저 테일러(드러머)와 존 디콘(베이시스트)이 한국에 처음 갔었지. 공연도 추진하려 했고. 금지곡이 많다는 이유 등으로 무산돼 안타까웠어. 내가 지구를 떠난 후 27년이 지나 이렇게 서로를 그리워하는 걸 보면 기적 같은 인연이야.

영화를 보니 1985년 공연 ‘라이브 에이드’를 재현한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어. 흰색 바지 입고 바주카포처럼 카메라를 어깨에 들러 메고 나와 함께 춤을 췄던 BBC 카메라맨 기억하는지. 진짜 모두 우리 음악을 즐기고 있구나 싶더라고. 우리가 해체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던 터라 더 고마웠어.

걱정이 많았던 공연이었어. 감기로 목 상태가 안 좋았지. ‘위 아 더 챔피언’을 부를 때 목소리가 갈라졌잖아. 주치의는 공연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어. 리허설(연습)만 런던 유스턴 거리에 있는 쇼어 극장에서 1주일을 했어. 우리의 열정을 알았는지 음향 엔지니어도 스피커 최대 출력 제한을 풀어버렸더군.

록밴드 퀸이 1985년 영국 런던 웸블리경기장에서 ‘라이브 에이드’ 공연을 하는 모습. 퀸 공식 홈페이지
 ◇솔로 활동은 로저 테일러가 먼저 

바로잡을 게 있어. 영화엔 매니저였던 폴 프렌터가 나한테 ‘라이브 에이드’ 공연 섭외 요청을 전하지 않은 걸로 나와. 내 삶의 반쪽인 옛 여자친구 메리 오스틴이 직접 날 찾아와 공연 얘기를 한 걸로 나오는데 사실과 달라.

일본 투어 끝내고 호텔에서 밥을 먹는데 매니저인 짐 비치가 ‘라이브 에이드’ 얘기를 꺼냈어. 당황하긴 했지. 음향 체크 없이 바로 공연을 이어가야 하는 데다 우리에게 주어진 공연 시간이 20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아프리카 기아 돕기라는 공연 취지엔 공감했어.

‘라이브 에이드’ 때 우린 지는 해라 불렸어. 음악 흐름이 완전히 바뀌고 있었을 때야. 그룹 듀란듀란의 ‘뉴 로맨틱’ 음악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놨어. 내 솔로 활동으로 퀸이 해체 위기에 놓였다는 영화 대목은 상상의 결과야. 우린 오래 해외 투어에 지쳐 휴식이 필요했어. 1983년 밴드 활동을 잠시 접고 각자 활동해 보기로 합의했지. 솔로 활동도 테일러가 제일 먼저 시작했어. 그 친구가 1981년에 ‘펀 인 스페이스’를 낸 뒤 4년 뒤인 1985년에 내가 ‘미스터 배드 가이’를 냈으니까.

영국 록밴드의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왼쪽부터)와 보컬 프레디 머큐리, 베이시스트 존 디콘,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 유니버설뮤직코리아 제공
 ◇“음악은 싸우면서 다듬어져” 

난 퀸을 좋아했어. 독일 뮌헨에서 홀로 살며 솔로 앨범 작업을 하며 깨달았어. ‘음악은 (멤버들끼리) 싸우면서 다듬어지는 거야’라는 걸. 멤버들이 의견을 내는 건 서로의 음악적 공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야. 브라이언 메이(기타리스트) 등 세 친구가 없었다면 퀸도 없었어. 퀸을 다시 정상에 올려 준 노래가 ‘라디오 가가’였는데, 이 곡을 테일러가 만들었어. 관객들이 발을 구르며 따라 부르는 ‘위 윌 록 유’는 메이가, ‘아이 원트 투 브레이크 프리’는 디콘이 각각 작곡했지.

영화처럼 공연장에서 우연히 만나 밴드를 꾸린 건 아니야. 테일러와는 퀸 결성 전에 같이 장사도 했어. 카스바란 가판을 열어 전설의 기타리스트인 지미 핸드릭스 그림과 그에 대한 논문 등을 팔았어. 카스바를 운영할 때 우리 고객이 유명 배우 마이클 케인이야. 난 1969년 영국 런던의 일링 칼리지(현 웨스트 런던대학교)를 졸업했어. 그래픽디자인 전공이었지.

록밴드 퀸의 프레디 머큐리와 브라이언 메이. 퀸 공식홈페이지
 ◇“‘어 나이트 앳 디 오페라’ 안 되면 해체해야 할 상황” 

1973년 1집 ‘퀸’을 EMI에서 내기까지 곡절이 많았어. 퀸 데뷔 전 히스로공항에서 수하물 나르는 일을 했던 것도 경제적 이유가 컸어. 1975년 낸 ‘어 나이트 앳 디 오페라’에 실린 ‘데스 온 투 레그스’에서 “넌 거머리처럼 내 피를 빨아먹지”라고 노래했잖아. 대형 공연도 하는데 정작 우린 돈 냄새도 맡을 수 없어 화가 나 만든 노래야.

‘어 나이트 앳 디 오페라’가 안 되면 우린 해체해야 하는 상황이었어. 음향과 조명 회사 등에 돈을 제대로 못 줬거든. ‘보헤미안 랩소디’를 두고도 의견이 엇갈렸어. 가사를 두고 말이 특히 많더라고. ‘마마 저스트 킬 더 맨’이란 대목이 메리와 헤어진 뒤 내가 내 안의 남성성에 사망 선고를 내린 은유라는 추측 등이 있었지. 모든 사람이 이 가사 뜻을 알려고 하는데 곡의 의미를 밝히게 되면 어떨 땐 곡이 망가져.

‘위 아 더 챔피언’은 한국에서도 인기더라고. 축구 팬이 좋아하고 함께 부르길 바라는 마음에서 썼어. 우리가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건 선수가 올림픽 경기에 나가는 것과 같아. 우리가 연주하면 관객들은 참여하기 시작하지. 공연은 통합의 장이니까. 관객들이 우리를 믿고 따라오고 우리와 함께 걷는 거지. 그게 올림픽이고 우리가 공연에서 하는 일이야.

 ◇메이가 소개해 준 오스틴 

연인으로 만나 최고의 친구로 남은 오스틴은 브라이언 소개로 알게 됐어. 영화는 옷가게에서 만난 걸로 묘사하지. 폴 매카트니가 ‘엄마인 메리가 와서 말했죠’(‘렛 잇 비’)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오스틴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어. 남녀관계를 청산한 후 영화에서처럼 런던 켄싱턴, 창문 너머로 그를 볼 수 있는 곳에 집을 구해줬어.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는 바로 오스틴을 위해 쓴 곡이야.

난 퀸 멤버들에게 죽을 때까지 음악을 만들고 싶다고 했어. 죽기 전 기적처럼 만들어진 앨범이 ‘더 미러클’(1989)과 ‘이누엔도’(1991)야. 난 무대에서 외롭지 않았어. 나의 비극적 삶보다 음악에 대한 열정을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영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나오는 노래도 ‘더 쇼 머스트 고 온’이잖아. 내 열정으로 내 쇼는 아직까지, 그리고 언제라도 계속될 거야. 에~오~ 에~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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